故 장자연 9주기, '미투운동' 이전에 그가 있었다
故 장자연 9주기, '미투운동' 이전에 그가 있었다
  • 승인 2018.03.08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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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배우 장자연이 세상을 떠난지 9년이 흘렀다. 언론사 관계자, 대기업, 금융업 종사자 등 31명에게 100여 차례의 술접대와 성상납을 강요당했던 그는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는 유서를 남긴 채 지난 2009년 3월 7일 경기도 분당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9살이었다. 인생의 꽃도 피우지 못하고 비참하게 꺾인 장자연의 비극이 알려지자 세상은 발칵 뒤집어졌다. 

장자연의 매니저 A씨가 공개한 유서에 따르면 "소속사 대표 김모 씨의 폭행이 두려워 술자리에 나가야 했다", "PD들, 감독들, 재벌, 대기업, 방송사 관계자 등이 날 노리개 취급하고 사기 치고 내 몸을 빼앗았다", "어머니 기일에도 술자리에 나가야 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장자연은 유서 아래 날짜와 자신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서명, 지장을 남겨 해당 문건은 자신이 직접 작성했음을 증명했다.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 '장자연 문건'으로 불리며 관심을 끌었던 그의 유서는 경찰 수사로 넘어갔다. 

경찰은 유서가 보도로 공개된 후 다음날 장자연의 소속사를 압수수색하고 필적감정을 의뢰하는 등 수사를 시작했다. 경찰은 당해 4월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9명을 '접대강요·강제추행·명예훼손' 등 혐의로 입건했다. 

문건에 언급됐던 다른 인사들에 대해서는 "술자리 접대를 받은 사실은 확인했으나 범죄 관련성이 확실하지 않아 내사중지 또는 내사종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장자연으로부터 술접대와 성상납을 받았다는 의혹에 휩싸인 인물은 30여명에 이르지만 이 중에서 재판까지 받은 인물은 소속사 대표 김모 씨와 매니저 유모 씨 뿐이다.

김 씨는 폭행 및 협박 등으로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받았다. 성폭행이 아닌 단순 폭행이었다. 유씨는 명예훼손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는데, 장씨가 아닌 소속사 대표에 대한 명예훼손이었다.

2011년 이종걸 의원은 '조선일보 방사장'을 거론하기도 했다. 그는 "사주 일가의 술자리에 장자연씨가 함께 있었으며, 매우 익숙한 파트너로 보였다"는 제보를 공개했다. 여론은 달아올랐다. 배우 문성근은 조선일보 앞에서 진실을 밝힐 것을 촉구하는 1인시위를 하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이 의원과 문성근을 비롯해 장자연과 해당매체를 연관지어 거론한 사람들을 대거 고소했다. 민사소송에서 패소 후 항소를 했지만 곧 취하했다. 또 다른 재판에서 '조선일보와 장자연씨는 관계가 없다'는 재판부의 언급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진실이 밝혀졌으니 더 재판을 진행하지 않겠다는 취지였지만 '사건을 빨리 덮으려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랐다.

결국 장자연 사건을 통해 제대로 처벌 받은 이는 한명도 없었다.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장자연의 유서에서 거론됐던 인물들은 전부 혐의가 없다며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피해자는 평생 씻지 못할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다 죽었지만, 가해자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예전처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면에는 추악함을 숨겨둔 채로 말이다.

장자연 사건은 끊임없이 부실 수사 의혹에 휩싸이고 있다. 지난해 검찰 과거사 위원회가 장자연 사건을 재조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며 관심이 집중됐지만, 1차 선정 대상에서는 제외됐다. 

하지만 최근 연극, 영화, 방송, 가요 등 문화계 전반에 걸쳐 미투운동이 확산되면서 장자연 사건에 대한 관심도 다시금 점화되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을 비롯한 여성단체들은 지난 1월 23일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앞에서 일명 '장자연 리스트'에 대한 재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성단체들은 “장자연씨의 죽음으로 소문으로만 떠돌던 여성 연예인의 성접대가 사실로 드러났다"며 "하지만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10년이 지났다. 검찰은 부실수사를 반성하고 즉각 재수사를 진행해 진상을 규명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권력과 이해관계에 있는 집단에 의해 성상납을 강요받았고,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지목된 사람들을 검찰이 왜 무혐의 처분을 했는지 철저하게 재수사해야 한다"면서 "진정으로 검찰 개혁을 하고자 한다면 검찰이 여성인권 관련 권력형 비리와 성 착취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미투 운동을 시작한 이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각종 병폐를 씻어내고 권력형 성범죄 처벌이 대폭 강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이 9년 전 지켜주지 못했던 고인의 넋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는 게 아닐까.

김정수 기자 ksr86@bstoda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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