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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무죄 무전유죄

 

지난해 버스 요금 2400원을 횡령했다며 운전기사를 해고한 것이 정당하냐는 법정 다툼이 벌어졌다. 17년간 일한 직장에서 2400원을 미납한 걸 두고 회사는 가차 없이 해고를 통보했고, 기사는 해고 무효확인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17년 동안 승차요금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고, 횡령 금액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기사의 손을 들어줬다. 2심 재판부는 "횡령은 아무리 소액이라도 사회 통념상 고용 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중대한 사유"라며 1심 판결을 뒤집었다. 기사가 "2400원을 빠뜨린 건 실수였다"고 하소연했지만, 법원은 '법대로' 판단했다. 대법원도 회사 측의 손을 들어줬고, 기사는 직장을 잃었다.

재계 1위 이건희 삼성 회장은 2009년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지 4개월 만에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활동'을 명분으로 사면됐다. 재계 2위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도 2008년 비자금 1034억 원을 조성하고 회삿돈 900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지만, 두 달 지나 광복절 사면에 포함됐다. 재계 3위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2008년과 2015년 두 차례나 광복절 특사로 풀려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재벌 총수에겐 1심 징역 5년, 2심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라는 '3·5 법칙'과 집행유예마저 사면받는 희한한 관행이 당연시됐다.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이 하루 일당 5억 원의 쇼핑백 만들기 '황제 노역'을 하는 동안 책임보험 없이 오토바이를 몰다 2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는 벌금 낼 돈이 없어 노역장에 유치됐다. 부자에게 20만 원의 벌금형은 대수롭지 않지만, 가난한 이에겐 어쩔 수 없이 노역형을 선택해야 하는 가혹한 형벌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353일 만에 석방되던 날, 거리에선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흘러나왔다. 30년 전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며 인질극을 벌이던 탈주범 지강헌이 죽기 전에 들었다는 노래다. 가진 이에겐 성기고, 없는 이에겐 촘촘한 법의 그물이 작동하는 방식은 30년 전과 달라졌을까? 2400원 횡령으로 해고된 기사가 대형로펌의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한 손엔 저울, 다른 한 손엔 칼을 들고 두건으로 눈을 가린 법의 여신 '디케'에게 묻는다.

이상헌 논설위원 tt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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