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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품이 된 백설기
유품이 된 백설기
  • 승인 2017.12.27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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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시 세끼 먹는 밥과 달리 떡은 특별한 의미를 담아 특별한 날에 먹던 음식이다. 백일상에 빠지지 않는 백설기도 그랬다. 백설기의 '백(白)'은 숫자 '백(百)'과 통한다. 꽉 찬 숫자인 '백(百)'에는 아이가 백일이라는 큰 고비를 넘겨 무탈하게 자란 걸 축복하고, 무병장수하는 출발점으로 삼겠다는 뜻도 담았다. 백설기는 100명이 먹어야 장수한다고 해서 100집 혹은 길 가는 100명과 나눠 먹었다고 한다. 

백설기는 다른 고물 없이 하얀 쌀가루만 시루에 안쳐 쪄낸 시루떡이다. 잡것이 조금도 섞이지 않고 순수한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 백설기는 신에게도 바치는 깨끗하고 신성한 음식이었다. 고슬고슬한 감촉에 쫀득하면서도 마른 듯한 질감의 백설기는 그런 깊은 뜻 때문인지 씹을수록 달콤했다.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백설기가 야속한 사연을 안고 돌아왔다.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로 아내를 떠나보낸 남편에게 유품으로 전해진 백설기 두 덩어리다. 투명한 랩으로 싸인 백설기는 화재 현장에서 수습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깨끗했다. 사고가 나던 날 교회에서 열린 불우이웃돕기 반찬 만들기 행사에 봉사하러 갔다가 아내가 챙겨 온 백설기였다. 

떡을 좋아하는 남편을 생각해 가방 속에 넣어 뒀던 거라고 한다. 끔찍한 그 일만 없었다면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며 부부가 오붓하게 나눠 먹었을 백설기였다. 아내는 백설기에 담긴 사랑의 의미를 남편한테 나직하게 들려줬을 테다. 주인을 잃고도 그을림 없이 온전하게 전해진 백설기 앞에서 남편은 무너졌다. 아내의 부재를 확인하는 야속한 백설기와 그 속에 담긴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며 남편은 오열했다. 

지난해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사고로 숨진 스무 살 청년의 가방 속 뜯지 않은 컵라면을 보던 것처럼 우리도 먹먹하다. 

'백설기 타령'이란 게 있다. 하필이면 참사가 벌어진 제천에서 구전되는 노래다. '먹기 좋은 무설기 보기 좋은 백설기라/백설 같은 흰나비는 부모님 몽상(蒙喪) 입었는가'로 시작한 '백설기 타령'은 '우리 친구 모인 중에 재미나게 유쾌하게/노시다가 헤집시다'로 끝맺는다. 백설에서 흰나비를 떠올리더니, 부모상을 당해 상복을 입었느냐고 되묻는 게 참 얄궂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백설기를 다시 생각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상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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