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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화류계 유곽은 어엿한 산업이었다
일제강점기 화류계 유곽은 어엿한 산업이었다
  • 승인 2017.12.08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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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유곽 '명호'의 일본인 노(老)예창기(藝娼妓) 가대(歌代·35) 총격 사건으로 부산부(釜山府)는 떠들썩했다. 함남 원산에서부터 가대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던 47세의 일본인 유부남 정부가 "너한테 미쳐 돈 잃고 직장도 잃었다"며 총 3발을 쏜 것이었다. 다행히 가대는 죽지 않았는데 당시 신문은 수술 경과와 퇴원 소식까지 시시콜콜 다뤘다. 아마도 그런 것이 식민지의 나른한 재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재미에 그친 게 아니라 유곽은 잘나가던 하나의 산업이었다. 부산부 세금의 15%를 감당할 정도였다. 1927년 4월 신문 1개 면 전면이 '녹정 유곽 특집'으로 꾸며지기도 했다. 부산 유곽의 창시자인 '안락정' 주인 우에노가 1925년 67세로 죽었을 때 신문은 '부산 화류계의 은인' '28세 때 조선에 건너 온 이래 오늘날까지 부산 번영에 공헌'이라는 2단짜리 부고 기사까지 실었다. 우에노는 부산상업회의소의 당당한 회원이었다. 그의 장남은 대창정 부산우편국 앞에서 서양 가구점을 크게 운영하고 있었다. 

산업은 당연히 장려책이 있어야 했다. 1910년대 매달 진행한 '예기 인기투표'가 그것이었다. 동아연초회사 부산판매소가 주최하고 부산의 양대 신문사에서 입회해 부산상업회의소에서 개표 행사까지 여는 그럴듯한 모양새도 취했다. 1915년 2월의 경우, 무려 8700여 명이 투표에 참가해 유곽 '일복루'의 예창기 '보단'이 1등을 차지했다. 유곽 '명호'의 예창기 '소복'도 꽤 유명했던 모양인데 매번 인기투표 등수에 그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등수에 들면 이름이 나서 매상을 올릴 뿐 아니라, 화장품 등의 상품도 받았다. 

예창기들은 '산업 역군'이어서 이들을 위로하는 위안잔치도 매년 봄가을에 열렸다. 매상을 많이 올린 우량 예창기 10~20명에 대한 포상식도 열고, 각종 공연이나 영화 관람까지 베풀었다. 1915년 예창기 300명이 영화관 '부산좌'에서 영화를 관람하기도 했으며, 1925년의 경우 일본인 예창기 위안회는 행관에서, 조선인 예창기 위안회는 보래관에서 각각 열렸다. 

그러나 유곽은 1930년대 중반께부터는 새롭게 등장한 '카페'에 밀려 힘이 부치기 시작한다. 예창기 위안잔치보다 '활극'과 사건이 신문에 소개되는 일이 빈번했다. 1940년 4월 11일 오전 6시 50분 녹정 유곽에서 일대 활극이 벌어졌다. '백수루' 2층에서 불이 나 옷을 걸치지 않은 손님들이 냅다 뛰쳐나왔다.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21세의 창기 '천조'는 2층에서 뛰어내리다가 부상을 입었고, 미처 화마를 피하지 못한 18세의 창기 '화기'는 그만 불에 타 숨졌다. 숨진 화기가 유곽으로 흘러든, 말 못 할 사연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최학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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