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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매축 수행한 이들은 숱한 피땀 바친 무명씨다
근대 매축 수행한 이들은 숱한 피땀 바친 무명씨다
  • 승인 2017.10.2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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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매축에는 도쿄의 정상 모리배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 부산거류민단,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 나고야 자본가들, 고베의 해운업자 나카무라 준사쿠(中村準策), 도쿄의 자본가 오사와 코지로(大澤幸次郞), '조선의 매축왕'으로 일컬어진 이케다 스케타다(池田佐忠)를 비롯한 온갖 이름들이 횡행했다. 그러나 물어보자. 근대 부산의 시가지를 만든 매축은 과연 누가 수행했던가. 이익을 탐하며 단물을 빼먹기만 했던 일본의 원정 자본가들, 막강한 배경을 바탕으로 정신없이 판을 벌였던 식민지 현지의 일본인 자본가였던가. 

부산 매축을 그들의 이름으로 돌리기에는 억울한 사연이 너무 많다. 만리장성을 진시황이 만들었느냐, 이름 없는 백성들이 만들었냐를 묻는 브레히트의 물음을 우리도 던져야 한다. 

1931년 2월 8일 부산의 매축 공사장에서 2건의 사고가 터졌다. 오후 1시 10분 영도 영선정 이케다(池田) 매축공사장 채토장의 4.5m 높이 언덕이 무너지면서 쏟아진 흙에 7명이 깔려 5명이 죽었다. 4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중상을 입은 3명 중 1명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숨졌다. 사망자는 경북 경주의 김덕수(22), 경남 의령의 전출이(22), 경북 성주의 김정술(20)과 안중술(29), 경북 청송의 황만복(23)이었다. 경남·북 농촌에서 온, 모두 20대 초반의 새파란 나이였다. 같은 날 오전 10시 반 남항 매축 공사장에서도 흙이 무너져 2명이 즉사하고 2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일어났다. 현장에서 즉사한 이는 경남 산청의 오상근(27)과 경북 칠곡의 김연호(47)였다.

이들은 부산 매축 현장에서 숱한 피와 땀을 흘렸던, 나아가 목숨까지 바쳐야 했던 이들의 일부 이름에 불과하다. 

공사장의 형편은 지독했다. '왼종일 죽게 일하여도 자기 홀몸도 먹지 못할' 형편이었다. 차라리 부산부(釜山府) 당국자들의 말대로 "사고가 빈발되어 생명이 위태한 것과 일이 너무 격렬하여 보통 궁민으로서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라면 나았다. '궁민 구제공사라고 표방하고 실업자를 모아다가 헐한 삯을 주고 일만 많이 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당을 70~75전을 준다고 해 놓고 50전만 주면서 일본인 청부업자들이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흑막이 통례였다. 그 능구렁이 같은 흑막과 격렬한 노동, 생명의 위태로움을 견디고 감내한 이들이 부산의 근대 매축을 이뤄 낸 것이었다. 사고로 목숨을 잃어야지 겨우 신문에 이름자를 올릴 수 있었던 이들, 아니 죽었어도 신문에 나지 못했던 그 숱한 사람들의 핏방울과 땀방울로 부산의 근대는 만들어졌다. 저 고독하고 찬란한 이름 무명씨, 우리는 이 이름 앞에 다시금 경건해지고 아득해질 수밖에 없다.

최학림 논설위원 the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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