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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과 실리
명분과 실리
  • 승인 2017.10.20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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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음력 1월 30일,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항전을 접고 삼전도로 나가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세 번 절하고 이마를 아홉 번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례. 병자호란은 그 매서웠던 엄동설한 칼바람만큼이나 차디찬 굴욕으로 끝났다. 근자에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은 김훈의 소설을 바탕으로 고립무원의 산성에 갇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해야 했던 그때의 47일을 다룬다. "적의 아가리 속에서도 분명 삶의 길은 있다." "그 삶은 곧 죽음이다. 한 나라의 군왕이 어찌 치욕스러운 삶을 구걸하느냐." 현실에서 삶의 길을 찾는 주화파(主和派) 최명길과 대의명분을 목숨보다 중시하는 척화파(斥和派) 김상헌의 치열한 설전은 영화의 백미다. 

명분-실리 논쟁은 철학사의 가장 굵직한 쟁점이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박 이후로 그 논리들을 더욱 심화한 '보편 논쟁'이 서양의 중세철학을 장식했다. 이 세계에 보편이라는 관념과 본질이 실제 존재한다는 '실재론(realism)'과 보편은 그저 이름일 뿐 낱낱의 사물만이 존재한다는 '유명론(nominalism)'이 맞섰다. 이후의 서양철학사도 이를 이어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이라는 커다란 두 흐름으로 전개됐다. 동양의 성리학에는 세상 만물의 운동과 관계를 설명하는 '이기론'이 있었다. '이(理)'는 세계가 형성되고 변화하는 근본 법칙 혹은 원리 같은 개념, '기(氣)'는 세계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물질적 요소와 비슷하다. 어느 쪽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관점은 달라진다. 조선의 성리학은 이상(理·명분)을 중시하는 '주리론(主理論)'을 현실(氣·실리)에 치중하는 '주기론(主氣論)'보다 높은 가치로 여겼다.  

명분과 실리 사이의 황금률 찾기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다. 크게는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에서, 작게는 개인의 일상에서 명분과 실리는 끊임없이 충돌한다. 영화에 나오지 않지만, 자결을 시도한 김상헌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고 나중에 청나라로 끌려갔다. 최명길 역시 이후에 명나라와 비밀 교섭을 도모한 사실이 발각돼 청으로 압송됐다. 이때 조우한 두 사람은 의심을 풀고 서로의 진심을 이해했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은 명분주의자면서 동시에 실리주의자였던 것. 그것을 억지로 나누는 일은 부질없다. 지금의 우리는 그때의 그들을 뛰어넘을 신념과 지혜를 가졌을까.

김건수 편집부 부장 kswoo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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