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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드 리버' 설원에서 발견된 소녀의 시체, 그 속에 감춰진 섬뜩한 진실
  • 윤성은 영화평론가
  • 승인 2017.09.15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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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이 뜬 밤. 그림처럼 펼쳐진 설원 위를 앳된 여성이 맨발로 뛰어간다. 잔뜩 겁에 질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뛰던 소녀는 쓰러져 절규하면서도 다시 일어나 뛰기를 반복한다. 질긴 생존 본능이 그녀를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고 있다. 인물의 처절한 몸부림과 달리 서정적인 애도의 시가 차분하게 내레이션으로 흐르면서 영화는 호소한다.

거친 세상 속 무고한 희생양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연기자로 커리어를 시작해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 '로스트 인 더스트'의 각본가로 명성을 얻은 테일러 쉐리던의 두 번째 연출작 '윈드 리버'(14일 개봉)는 이렇듯 간결하면서도 강렬하게 영화의 기조를 전달하며 시작한다. 올해 가장 인상적인 오프닝 중 하나다.


야생동물 헌터인 '코리'는 윈드 리버 산맥지역에서 열여덟 살 소녀의 시체를 발견한다. 사건의 담당자로 신입 FBI 요원인 '제인'이 파견되고, 제인은 코리에게 공조를 요청한다. 코리는 3년 전, 인근에서 벌어졌던 살인 사건과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제인을 도와준다. 눈보라 때문에 수사에 난항을 겪으면서도 천천히 인디언 소녀 '나탈리'와 외부에서 온 공사 현장 관리인 '맷'의 사연이 밝혀진다.

먼저, 영화는 이 지역에 뿌리 깊은 인디언과 백인, 지역 토박이와 외부인들 사이의 갈등을 다룬다. 사방에 눈 밖에 없는 이 차갑고 쓸쓸한 마을에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일부 인간들은 시한폭탄처럼 분노를 키우며 살고 있다. 그들이 한 순간에 폭력적으로 돌변해 나탈리와 그녀의 연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과정은 충격적이다. 작은 체격의 어린 신입 요원 제인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바라보는 못 미더운 시선들은 '편견'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키는 또 하나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좀 서투르지만 제인은 그 시선들을 딛고 위험천만한 임무를 성실하게 완수해간다.

또한, 비슷한 사건으로 딸을 잃은 적이 있던 코리는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에 대한 테마를 끌고 가는 인물이다. 그는 인생의 선배로서 나탈리의 아버지에게 "고통을 견뎌라. 벗어나려 하지 말고 슬픔을 받아들여라" 라는 말로 위로한다. 고통의 무게를 온전히 통감하는 것만이 예기치 못한 사고로 세상을 떠난 딸을 애도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코리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실천하듯 범인으로 하여금 맨발로 눈길을 10㎞나 달아났던 피해자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장면은 윤리적인 시비보다 사필귀정의 교훈을 떠올리게 한다. 꽉 짜인 서사와 설득력 있는 캐릭터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스타일이 걸출한 작가로서 테일러 쉐리던의 활약을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윤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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